•고 승 전

강승회

불암산 2011. 8. 23. 00:24

    강승회(康僧會) 강승회의 선조는 강거(康居) 사람으로 대대로 천축국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장사꾼이었기 때문에 교지(交趾)로 옮겨갔다. 강승회가 십여 세 무렵에 부모님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지극한 효자였다. 상복을 벗고서야 출가하여 매우 엄격하게 힘껏 수행하였다. 사람됨이 관대하고 올바르며 학식과 도량이 있었다. 뜻을 돈독히 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여 환히 삼장(三藏)을 이해하였다. 널리 육경(六經)을 보고, 천문(天文)과 도위(圖緯)에 대해서도 두루 섭렵하였다. 요점을 잘 분별하여 자못 글을 잘 지었다. 당시 손권이 이미 강남을 지배하였다. 부처의 가르침은 아직 행해지지 못했다. 이보다 앞서 우바새인 지겸(支謙)이 있었다. 자는 공명(恭明)이고, 일명 월(越)이라고 하였다. 본래 월지의 사람으로 한나라에 와서 노닐었다. 과거 한나라 환제(桓帝)에서 영제(靈帝)에 이르는 기간에 지참(支讖)이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또 지량(支亮)이라는 인물은 자(字)가 기명(紀明)으로, 지참에게 배움을 받았다. 지겸은 또한 지량에게서 수업을 받았다. 널리 경서를 읽어 정밀하게 탐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세간의 기예(伎藝)를 익힌 것이 많았으며 다른 나라의 글도 두루 배워 여섯 나라의 말에 뛰어났다. 그 모습은 호리호리한 큰 키에 몸이 마르고 거무튀튀하였다. 눈은 흰자위가 많고 눈동자는 누런빛을 띠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에 대하여 말하였다. 지랑(支郞)은 누런 눈동자에 몸이 비록 호리호리하지만 꾀주머니[智囊]이다.” 한나라 헌제(獻帝, 190~220) 말에 난리가 일어나자 오나라로 피하였다. 손권(孫權)이 그가 재주가 있고 지혜롭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불러 만나보고 기뻐하였다. 벼슬을 주어 박사(博士)로 삼아 동궁(東宮)을 돕고 이끌도록 하였다. 위요(韋曜)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보탬이 되 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한나라 바깥 지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오지(吳志)』에는 실리지 않았다. 지겸은 불법의 큰 가르침이 행해지고는 있지만, 경들이 대부분 범문이라서 아직 번역이 미진하다고 여겼다. 외국어를 아주 잘하므로 여러 본들을 수집하여 한문으로 번역하였다. 오나라 황무(黃武) 원년(元年, 222)에서 건흥(建興, 252~253) 중에 이르기까지 유마경(維摩經)』·『대반니원경(大般泥洹經)』·『법구경(法句經)』· 서응본기경(瑞應本起經)』 등 마흔아홉 가지의 경을 번역해냈다. 곡진하게 성스러운 뜻을 실었으면서도 말의 뜻이 운치가 있고 우아하였다. 또한 『무량수경(無量壽經)』과 중본기경(中本起經)』에 의거하여, 「보리련구(菩提連句)」와 「 범패삼계(梵唄三契)」를 지었다. 아울러 『요본생사경(了本生死經)』 등에 주석을 달았다. 모두 세상에 행한다. 당시 오나라에 처음으로 불교의 큰 법이 퍼졌으나, 풍속의 교화[風化]는 아직 완전하지 못하였다. 강승회는 강남[江左]25)에 불도를 떨치어 탑과 사찰[圖寺]을 성하게 일으키고자 하여, 지팡이를 짚고 동쪽으로 떠돌아다녔다. 오나라 적오(赤烏) 10년(248)에 처음 건업(建鄴)26)에 이르러 띳집을 지어 불상을 모시고 도를 행하였다. 당시 오나라에서는 사문을 처음 보았다. 이 때문에 그 모습만 보고 도(道)는 알지 못하여 이상하게 속이는 짓이라고 의심하였다. 그래서 담당 관리가 손권(孫權)에게 아뢰었다. 어떤 오랑캐가 국경 안으로 들어와 자칭 사문이라 합니다 얼굴이나 복장이 보통과는 다릅니다. 이 일을 조사해봐야 하겠습니다.” 손권이 말하였다. 옛날 한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본 신(神)을 부처로 불렀다고 한다. 그들이 섬기는 바가 어찌 옛날의 그것이 아니겠는가?” 즉시 강승회를 불러 꾸짖어 물었다. 어떠한 영험(靈驗)이 있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여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지가 어느덧 천 년이 흘렀습니다. 유골인 사리는 신비하게 빛을 발하여 사방을 비춥니다. 옛날 아육왕(阿育王)27)은 탑을 세운 것이 팔만 사천 개입니다. 대개 탑과 절을 일으키는 것은 여래께서 남기신 교화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손권은 이 말을 듣고 과장되고 허황하다고 여겨서 강승회에게 말하였다. 만약 사리를 얻는다면 마땅히 탑사를 세우겠다. 그렇지만 그것이 헛되고 망령된 것이라면 나라에서 정한 형벌대로 하리라.” 이에 강승회는 이레 동안의 기일을 청하고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법이 흥하느냐 망하느냐가 이 한 번의 일에 달려 있다. 지금 지극한 정성으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다시 어떻게 할 것인가.” 그리고는 모두 고요한 방에서 깨끗하게 재계하면서, 구리로 만든 병을 상에 놓고 향을 피워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이레의 기한이 끝났지만 고요할 뿐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에 다시 이레 동안의 기간을 더 얻었으나 역시 전과 같았다. 손권은 사람을 속이는 거짓된 일이라 하고 죄를 주고자 하였다. 강승회가 다시 세 번째로 이레의 기간을 청하였다. 손권은 다시 한 번 특별히 그 청을 들어 주었다. 강승회는 그의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공자께서는 ‘문왕이 이미 돌아가셨으나 그 분이 남기신 문(文)은 여기에 있지 않는가?’라 하셨다. 법의 영험이야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아무런 감응이 없다면, 왕이 벌을 내리기를 기다릴 것도 없다. 마땅히 죽을 각오로 바라야만 할 것이다.” 21일 저녁 무렵에도 보이는 바가 없자, 모두들 두려움에 떨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데 5경(更)29)이 되자 문득 병 속에서 달그랑 달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강승회가 가서 살펴보니 과연 사리가 들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강승회는 사리를 가져다가 손권에게 바쳤다. 조정에 모인 신하들이 모두 모여 바라보았다. 오색의 찬란한 광채가 사리병 위로 뻗쳐 나왔다. 손권이 직접 손으로 구리 쟁반 위에 병을 기울이자, 사리가 부딪쳐 쟁반이 곧 깨어지고 말았다. 손권은 몹시 두려워서 놀라 일어나 말하였다. 참으로 보기 드문 상서로다.” 강승회가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사리의 신비로운 위엄이 어찌 다만 광채를 발하는 일에만 그치겠습니까? 세상의 종말을 사르는 불로도 태울 수 없고, 금강(金剛)의 방망이로도 깨뜨릴 수 없습니다.” 손권은 명령을 내려 그것을 시험하였다. 강승회는 다시 맹서하여 말하였다. 진리의 구름이 사방을 덮으면, 모든 백성들이 그 은택에 우러러 젖게 됩니다. 원하건대 다시 신비로운 자취를 드리우시어, 널리 위엄 서린 영험을 보여 주소서.” 이에 사리를 쇠로 된 다듬잇돌 위에 올려놓고, 힘이 센 자에게 내려치도록 하였다. 쇠로 된 다듬잇돌은 움푹 패이고, 사리는 아무런 흠집도 생기지 않았다. 손권은 크게 탄복하고 즉시 탑사(塔寺)를 세웠다. 처음으로 절을 세웠기 때문에 건초사(建初寺)라고 부른다. 그곳의 땅 이름은 불타리(佛陀里)라고 한다. 이로 말미암아 강남에서 불법이 마침내 일어났다. 그 후 손권의 손자 손호(孫皓)가 정사를 맡자 법령이 가혹해졌다. 부정(不正)한 제사를 모두 없애 버렸으며, 절도 아울러 헐어 없애고자 하였다. 손호가 말하였다. 이런 절들이 어찌하여 일어나는가? 만약 그 가르침이 참되고 올곧아서 성스러운 가르침과 서로 맞는 것이 있다면 마땅히 그 도를 받들겠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진실하지 못하다면 모두 다 불태워 버리리라.” 여러 신하들이 모두 아뢰었다. 부처의 위엄 서린 힘은 여타의 다른 신(神)과는 다릅니다.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께서 절을 창건하였습니다. 이제 만약 가볍게 여겨서 훼손한다면 후회할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손호는 장욱(張昱)을 절로 보내어 강승회를 꾸짖도록 하였다. 장욱은 본래 재치 있게 말을 잘하는지라, 종횡무진으로 어려운 질문을 퍼부었다. 강승회는 임기응변하여 대답을 펼쳐 나갔다. 말의 이치가 창날 솟구치듯 날카롭게 빼어나 막힘이 없었다. 아침 일찍부터 저녁까지 장욱은 강승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다. 장욱이 그곳에서 물러나 돌아갈 적에 강승회가 문까지 배웅을 하였다. 마침 절 옆에 부정한 신에게 제사를 모시는 자가 있었다. 장욱이 말하였다. “부처의 신묘한 가르침이 그렇게 훌륭하다면, 어떤 까닭으로 이러한 무리들이 가까이에 있는데도 고치지 못하는가?” 강승회가 말하였다. 뇌성벽력이 산을 부술 정도로 요란하다 할지라도 귀머거리가 듣지 못하는 것은 그 소리가 작아서가 아닙니다 참으로 이치가 통하면 만 리 밖에서도 응하게 마련입니다. 만약 그것이 막혀 있다면, 간장과 쓸개처럼 아무리 가까이 붙어 있다 하더라도, 초(楚)나라나 월(越)나라처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肝膽楚越]이나 다름없습니다.” 장욱은 돌아와 칭찬하였다. 강승회의 재주와 명석함은 제가 헤아릴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원하건대 왕께서 친히 살펴보소서.” 손호는 크게 조정의 인재를 모아 놓고, 마차를 보내어 강승회를 맞이하였다. 강승회가 자리에 앉자 손호가 물었다. 부처의 가르침에서 밝히는 선악보응(善惡報應)이란 무슨 뜻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무릇 훌륭한 임금이 효성과 자애로써 세상을 가르치면, 붉은 까마귀가 날고 노인성(老人星)이 나타납니다. 어진 덕으로 만물을 기르면, 예천(醴泉)이 솟아오르고 아름다운 곡식이 납니다. 이와 같이 선한 행위를 하면 상서로운 일이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면 또한 그와 같이 거기에 상응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귀신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드러난 곳에서 악한 일을 하면 사람들이 그에 대한 벌을 줍니다. 주역(周易)』에서도 ‘ 착한 일을 많이 한 집에 반드시 좋은 일들이 많을 것이다 [積善餘慶]’라고 합니다. 시경(詩經)』에서도 ‘복을 구하는 데 도리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네[求福不回]라고 읊습니다. 비록 유가 경전의 바른 말씀이라고는 하지만, 또한 부처의 가르침에서도 나오는 사리 분명한 교훈입니다.” 손호가 다시 물었다. “만약 그렇다면 주공(周公)이나 공자가 이미 밝히신 것이니, 불교의 쓰임새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강승회가 대답하였다. 주공이나 공자의 말씀은 대략 우리와 가까운 자취만을 보여 주었습니다. 하지만 부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윽함과 미묘함이 몹시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악한 일을 행하면 오랜 세월 동안 지옥에서 고통을 겪어야 하고, 선한 일을 행하면 길이 극락세계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선을 권하고 악함을 막고자 밝혔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 가르침이 크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손호는 그 때 그 말을 꺾을 만한 방법이 없었다. 그렇지만 손호가 불교의 바른 법을 들었다고는 하나, 어리석고 포악한 성질 때문에 그 잔학함을 누를 수가 없었다. 그 뒤에 숙위병(宿衛兵)들을 후궁(後宮)으로 보내어 정원을 수리하였다. 이 때 땅 속에서 높이가 몇 자[數尺]나 되는 금으로 된 불상을 발견하고는 손호에게 바쳤다. 손호는 불상의 깨끗하지 않은 부분을 드러내어 더러운 오물을 끼얹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웃으면서 즐거워하였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온몸에 큰 종기가 생겼다. 특히 음부(陰部) 부분이 더욱 아파서 울부짖는 소리가 하늘을 찌르는 듯하였다. 태사(太史)가 점을 쳐서 말하였다. “위대한 신을 범했기 때문이옵니다.” 즉시 여러 사당에 기도를 드렸으나, 끝내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 궁녀 중에 이전부터 불법을 받드는 자가 있었다. 궁녀가 손호에게 물었다. “폐하께서는 절에 나아가 복을 빌어 보시지 않을는지요?” 손호는 머리를 쳐들고 말하였다. “부처라는 신(神)이 그렇게 위대한가?” 그러자 궁녀가 말하였다. “부처는 위대한 신이십니다.” 드디어 손호는 마음속으로 궁녀가 말한 뜻을 깨달았다. 그래서 궁녀는 즉시 불상을 가져다가 전(殿) 위에 모셔 두었다. 향내나는 더운물로 수십 번을 씻고 나서, 향을 사르고 참회하였다. 손호는 정성스럽게 베갯머리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자신의 죄상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차차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사신을 절로 보내 도인(道人)을 찾아, 그에게 설법해 주기를 청하였다. 강승회가 그를 따라 궁으로 들어갔다. 손호는 예를 갖추어 죄와 복을 얻는 연유에 대하여 물었다. 강승회는 그를 위하여 상세하게 풀어 설명하였다. 그 말이 매우 정밀하고 요점이 있었다. 손호는 원래 뛰어난 이해력이 있기 때문에 매우 기뻐하였다. 이로 인해서 사문의 계율이 어떠한 것인지 알고자 하였다. 강승회는 계율의 내용이 비밀 스러운 것이라서, 사문(沙門)이 아닌 자에게는 가벼이 알려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본업(本業) 백삼십오원(百三十五願)을 취하였다. 그것을 일상의 생활에서 끊임없이 중생을 구원하기를 원하는 이백오십사(二百五十事)로 분류하였다. 손호는 자비의 원력이 크고도 넓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착한 마음을 더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곧장 강승회에게 나아갔다. 5계(戒)를 받고 나서 열흘 만에 질병이 깨끗이 나았다. 이에 강승회가 머무는 절을 더욱 잘 꾸몄다. 종실(宗室)에도 반드시 받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널리 알렸다. 강승회는 오나라 조정에서 자주 불법을 설하였다. 그렇지만 손호의 성품이 흉악하고 거칠어서 오묘한 뜻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오직 응보(應報)와 같이 알기 쉬운 일들을 이야기하여, 그의 마음을 열어 주었다. 강승회는 건초사(建初寺)에서 여러 경들을 번역했다. 이른바 『아난염미경(阿難念彌經)』·『경면왕경(鏡面王經)』· 『찰미왕경(察微王經)』·『범황경(梵皇經)』 등이다. 또한 『소품경(小品經)』·『육도집경(六度集經)』· 『잡비유경(雜譬喩經)』 등을 번역했다. 모두 경의 본질을 신묘하게 터득하고 글의 뜻도 참으로 올바르다. 또 니원(泥洹)의 패성(唄聲: 범패소리)33)을 전하였다. 맑으면서도 아름답고, 슬프면서도 밝은 분위기여서 한 시대의 모범이 되었다. 또한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법경경(法鏡經)』·『도수경(道樹經)』, 이 세 가지 경전에 주석을 달고 아울러 경의 서문을 지었다. 말의 취지가 바르면서 무르익고 뜻이 은근하고 그윽하여 모두 세상에 알려졌다. 오나라 천기(天紀) 4년(280) 4월 손호가 진(晋)나라에 항복하였다. 9월에는 강승회가 병에 걸려 돌아가셨다. 이 때가 진나라 무제(武帝) 태강(太康) 원년(280)이다. 진나라 성제(成帝, 326~335) 함화(咸和) 중에 소준(蘇峻)이 난을 일으켜 강승회가 세운 탑이 불탔다. 사공(司空) 하충(何充)이 이를 수리하여 다 시 지었다. 평서장군(平西將軍) 조유(趙誘)는 대대로 불법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삼보(三寶)를 업신여겼다. 이 절에 들어가서 여러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오래 전부터 이 탑이 자주 빛을 발한다고 들었다. 헛되고 괴이하여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 믿을 수 없다 만약 내가 직접 보게 된다면 더 따질 일이야 없겠지만.” 말을 마치자마자 탑에서 즉시 오색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법당과 당간[堂刹]까지 비추었다. 조유는 두려워 털끝이 바짝 곤두섰다. 이로 말미암아 조유는 불법을 믿고 공경하여, 절의 동쪽에 다시 작은 탑을 세웠다. 이는 멀게는 크나큰 성인[大聖]이신 부처님의 신령스런 감응이며, 가까이로는 역시 강승회의 힘이다. 그러므로 그의 초상화를 그려서 지금까지 전한다. 손작(孫綽)이 그를 위하여 찬(贊)을 지었다. 님께서 남긴 범패 소리 참으로 아름다운 바탕일세 눈앞의 걱정 따위 사라지니 넉넉하고 편안할손 어두운 밤과 같은 허물 떨쳐 물리치시어 초연하게 멀리 나아가고 우뚝 높이 솟았구려. 會公簫瑟  寔惟令質   心無近累 情有餘逸   屬此幽夜  振彼尤黜 超然遠詣  卓矣高出 어떤 기(記)에 이르기를, “손호가 사리(舍利)를 쳐서 시험한 것으로 보아, 손권의 시대는 아니라고 일컫는다”고 하였다. 내가 생각해 보건대, 손호가 절을 부수려고 할 때 여러 신하들이 모두 답하기를, “강승회의 상서로운 감응 때문에 대황(大皇: 손권)께서 절을 창건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처음에 사리의 신통함을 느끼게 된 일은 필시 손권의 시대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적은 전기(傳記)에서는 모두 말한다. “손권이 오나라 궁중에서 사리의 신통함을 알았다”고 하였다. 그 후에 다시 신의 영험함을 시험한 것은 어쩌면 손호일 수 있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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