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승 전

안청

불암산 2011. 8. 13. 14:58

      안청(安淸) 안청의 자(字)는 세고(世高)이다. 안식국(安息國)왕과 정후(正后) 사이에서 태어난 태자이다. 어려서부터 효행으로써 칭송을 받았다. 게다가 총명하고 민첩하게 공부하며 애써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외국의 전적(典籍) 및 칠요(七曜)9)·오행(五行)·의방(醫方)·이술(異術)과 날짐승이나 들짐승의 소리에 이르기까지 통달하지 못한 것이 없었다. 어느 날 안세고가 길을 가다가 한 떼의 제비를 보고는 문득 같이 가던 이에게 말하였다. 제비가 ‘반드시 먹을 것을 보내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지저귑니다.” 조금 있다가 과연 먹을 것을 가져온 사람이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기므로 빼어나게 남다르다는 명성이 일찍부터 서역에 퍼졌다. 안세고는 출가하기 전에도 계율을 받드는 것을 매우 엄격히 하였다. 부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에 인생의 괴로움과 헛됨[空]을 깊이 깨닫고, 걸림돌이 되는 육체를 꺼려 떠나고자 하였다. 그래서 상복을 벗은 뒤에 마침내 숙부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출가하여 불도를 닦았다. 그는 경장(經藏)을 널리 알았다. 특히 아비담학(阿毘曇學)에 정통하고 선경(禪經)을 깨달아 간략하게 그 미묘함의 끝까지 다 하였다. 그 후 그는 여러 곳을 돌아다니면서 널리 교화를 폈다. 한나라 환제(桓帝)12) 초기에 처음으로 중국에 이르렀다. 그는 재주와 깨달음이 빠르고 민첩하여 한 번 듣기만 해도 능숙하였다. 그래서 중국에 이른 지 오래지 않아 곧 중국말을 완전하게 익혔다. 이에 많은 경전을 번역하여 범어(梵語)를 한문으로 옮겼다.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음지입경(陰持入經)』 ·대(大)·소(小)의 『십이문경(十二門經)』· 『백육십품경(百六十品經)』 등이 그것이다. 과거 외국의 삼장(三藏)13)인 중호(衆護)가 경의 요점을 찬술하여 27장(章)을 지었다. 안세고는 여기에서 7장을 뽑아 한문으로 번역해 냈다. 바로 『도지경(道地經)』이 이것이다. 안세고가 앞뒤로 낸 경론(經論)은 모두 39부(部)이다. 이치를 밝게 분석하고 문자를 참으로 올바르게 썼다. 설명을 잘하면서도 화려한 데로 흐르지 않고, 표현이 질박하면서도 거칠지 않았다. 이는 무릇 읽는 자들이 부지런히 힘쓰면서도 싫증나지 않도록 한 것이다. 안세고는 하늘의 이치와 사람의 본성을 깊이 더듬어 저절로 인연의 업보를 알았다. 세상에서 헤아려 생각할 수 없는 신령한 자취가 많았다. 어느 때인가 안세고는 스스로 말하였다. “전생에도 이미 출가하였다. 그 때 함께 공부하던 벗 가운데 성을 잘 내는 사람이 있었다. 걸식하러 다니다가 마뜩치 않은 시주(施主)를 만나면 그 때마다 번번이 원한을 품었다. 내가 자주 꾸짖고 타일렀지만 끝내 잘못을 뉘우치거나 고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세월이 20여 년이 흐른 뒤 벗과 이별을 하며, ‘나는 광주(廣州) 로 가서 전생[宿世]의 인연을 끝마치려 한다. 그대는 경에 밝고 부지런히 수행하는 것이 나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품이 성을 내고 노하는 일이 많아서 생명이 다한 뒤에는 반드시 악한 몸을 받을 것이다. 만일 내가 도를 얻게 된다면 반드시 그대를 제도하리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광주에 이르니 도적 떼들이 크게 난을 일으켰다. 길에서 마주친 한 소년이 손에 침을 뱉고 칼을 뽑으며 말하기를 ‘진정 너를 여기서 만나는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하기를, ‘나는 그대에게 숙명적인 빚이 있다. 그래서 먼 곳에서 찾아와 그것을 갚으려고 한다. 그대의 분노는 본래 전생에서 가졌던 생각이다’ 하고는, 목을 늘이고 칼을 받아 얼굴에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끝내 도적은 나를 죽이고 말았다. 길을 가득 메워 지켜보던 사람들이 그 기이한 광경을 보면서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후에 나의 영혼은 돌아와 안식국왕의 태자가 된 것이니 이것이 지금의 이 몸인 것이다.” 안세고는 중국을 돌아다니며 교화하면서 경을 널리 펼치는 일을 마쳤다. 영제(靈帝) 말엽에 관락(關洛: 關中·洛陽)이 몹시 어지러웠다. 이에 강남에 법을 전하려고 가면서 말하였다. “나는 여산(廬山)을 지나면서 옛날에 같이 공부하던 벗을 제도해야만 한다.” 걸어 공정호(䢼亭湖)의 사당에 이르렀다. 이 사당에는 예로부터 위엄서린 신령[靈威]이 있었다. 떠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사람들이 여기에서 기도하면, 바람이 순조롭게 불어 사람들이 지체하여 머무르는 일이 없었다. 언젠가 사당 신령의 대나무[神竹]를 구하는 사람이 있었다. 미처 허락을 받기 전에 마음대로 가져갔다. 배가 즉시 뒤집혀서 가라앉고 대나무[竹]는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이런 일이 있고부터는 뱃사람들이 공경하고 꺼려하여, 신령의 그림자만 비쳐도 두려워 떨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안세고와 함께 가던 삼십여 척의 배가 이 사당에 희생을 바치고 복을 빌었다. 신령이 내려와 축관의 입을 빌려 말하였다. “배 안에 있는 사문을 어서 모셔 오라.” 선객들이 모두 크게 놀라 안세고에게 사당으로 들어가기를 청하였다. 신령은 안세고에게 말하였다. “내가 전생에 외국에서 그대와 함께 출가하여 도를 배웠을 때, 곧잘 보시하기를 좋아하면서도 성내어 노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지금은 공정호의 사당신이 되어 주변 천 리를 제가 다스립니다. 예전에 보시한 공덕으로 진귀한 보물이 몹시 풍부합니다. 하지만 예전에 성을 내던 성품 때문에 이처럼 신령이 되는 업보를 받았습니다. 오늘 함께 공부하던 벗을 만나니, 슬프기도 하고 기쁘기도 합니다. 수명을 곧 마칩니다만 보기 흉한 형체가 너무도 큽니다. 만약 여기에서 죽으면 강호를 더럽히므로 산서(山西)의 못으로 가려 합니다. 이 몸이 죽고 난 뒤에는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습니다. 내게 있는 비단 천 필과 여러 가지 보물로 불법을 세우고 탑을 만들어서 좋은 곳에 태어나도록 해 주십시오.” 안세고가 말하였다. “일부러 제도하러 여기까지 왔거늘 어찌하여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신령이 말하였다. “몹시 보기 흉한 모습이라서, 사람들이 보면 반드시 두려워할까봐 그렇습니다.” 안세고가 말하였다.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그다지 괴이쩍게 여기지 않으리다.” 그러자 신령이 제단 뒤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길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커다란 이무기였다. 그 꼬리가 안세고의 무릎까지 이르렀다. 안세고가 그를 향해 범어(梵語)로 몇 마디 나누고 몇 수 범패(梵唄)로 찬탄하였다. 이무기는 슬픔의 눈물을 비 오듯이 흘리더니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안세고는 곧 비단과 보물을 거두어 이별하고 떠났다. 배들이 돛을 올리고 떠나자 이무기가 다시 몸을 드러내어 산에 올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이 손을 흔들자 이내 모습이 사라졌다. 삽시간에 예장(豫章)에 당도하였다. 곧장 공정호의 사당에서 가지고 온 물 건으로 동사(東寺)를 세웠다. 안세고가 떠나간 후에 신령은 바로 수명을 다하였다. 저녁 무렵에 한 소년이 배 위에 올랐다. 안세고 앞에서 길게 무릎을 꿇고 그에게서 주원(呪願)을 받고는 문득 사라졌다. 안세고는 뱃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방금 전에 있던 소년이 바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인데, 흉한 모습에서 벗어났구려.” 이로부터 사당의 신령은 사라지고 다시는 영험한 일이 없었다. 뒤에 사람들이 산서(山西)의 못에서 죽은 이무기 한 마리를 보았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몇 리에 이르렀다. 지금의 심양군(潯陽郡) 사촌(蛇村)이 바로 그곳이다. 안세고는 그 뒤에 다시 광주(廣州)로 가서 전생[前世]에 자기를 해친 소년을 찾았다. 그 때의 소년은 아직도 살아 있었다. 안세고는 그의 집으로 가서 예전의 인과에 얽힌 일을 말하였다. 아울러 숙명의 인연을 들려주고 다시 만난 것을 기뻐하면서 말하였다. “나에게는 아직도 갚아야 할 일이 남았습니다. 이제 회계(會稽) 땅에 가서 그것을 다하려고 합니다.” 광주의 이 사람은 안세고가 비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뜻이 환히 풀려서 이해되자, 지난날의 잘못을 거슬러 올라가 뉘우치고는 정중하게 대접하였다. 안세고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마침내 회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 이르자마자 시장으로 들어섰다. 마침 시장 안에서는 싸움판이 벌어졌다. 서로 치고 받는 자들이 잘못 주먹을 휘둘러 안세고의 머리를 치는 바람에 그 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광주 사람은 연거푸 두 가지 보응을 경험하고는 드디어 불법을 부지런히 닦았다. 아울러 사연을 다 갖추어 이야기하니, 멀거나 가깝거나 그 소식을 들은 이들이 비통해 마지않았다. 삼세(三世)에 걸친 인연이 징험이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안세고는 왕족이면서 서역에서 온 손님이라서 모두 안후(安侯)라고 불렀다. 지금까지도 그렇게 호칭한다. 천축국은 자칭 그들의 글을 천서(天書)라 하고 말을 천어(天語)라 한다. 중국과는 아주 달라서 소리와 뜻이 잘 맞지 않는다 안세고 전후로 나온 번역들 중에는 잘못된 것이 많다. 안세고가 번역한 것만이 여러 번역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도안(道安)은 ‘경을 대하여 가르침을 받는다면 성인을 뵙고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다. 여러 세대에 걸쳐 밝은 덕을 지닌 분들께서도 다 같이 이처럼 찬탄하고 사모하신 것이다. 내가 여러 기록을 찾아보니, 안세고의 일을 기재하는 내용이 실려 있기도 하고 빠져 있기도 하다 . 아마도 권적(權迹)16)을 드러내거나 숨기기도 하고, 응하거나 응하지 않던 것[應廢]의 실마리가 너무 많기[多端] 때문이다 . 간혹 전달하는 자의 잘못으로 말미암아 서로 내용이 어긋났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여러 가지 차이를 함께 나열한다면, 그런 대로 논의를 할 만할 것이다. 석도안(釋道安)의 경록(經錄)에서는 말한다. “안세고(安世高)는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148)에서 영제(靈帝) 건녕(建寧) 연간(168~171)에 이르는 20여 년 동안에 30여 부의 경을 번역해 냈다.” 또 『별전(別傳)』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태강(太康, 280~289) 말년에 안후(安侯)라는 도인(道人)이 있었다 . 상원(桑垣)에 와서 불경을 번역하여 냈다. 이윽고 함 하나를 봉하여 절에 두며 이르기를, ‘ 4년이 지난 후에 그것을 열어 보시오’라고 하였다. 오(吳)나라 말기에 양주(楊州)로 가서 사람을 시켜 물건 한 상자를 팔아 노비를 한 사람 샀다. 그리고 복선(福善)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고 말하기를, ‘ 이 사람은 선지식(善知識)18)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노비를 데리고 예장(豫章)으로 가서 공정호 사당의 신령을 제도하고 , 신령을 위해 절을 세우는 일을 마쳤다. 복선이 칼로 안후의 늑골을 찌르니, 여기에서 돌아가셨다. 상원 사람들이 이에 그가 봉한 함을 여니 나뭇결이 저절로 글자를 이루기를, ‘나의 도를 높일 사람은 거사(居士) 진혜(陳慧)요, 『선경(禪經)』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僧會)이다’라고 하였다. 이 날이 바로 4년째 되는 날이다.” 또 유중옹(庾仲雍)의 『형주기(荊州記)』에서는 말한다. “진(晋)나라 초에 안세고(安世高)라는 사문이 공정호 사당 신령을 제도하여 재물을 얻었다. 형성(荊城)의 동남쪽 모퉁이에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 송나라 임천(臨川) 강왕(康王)의 『선험기(宣驗記)』에서는 말한다. “이무기[蟒]가 오(吳)나라 말에 죽었다.” 담종(曇宗)의 『탑사기(塔寺記)』에서는 말한다. “단양(丹陽) 와관사(瓦官寺)는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사문 혜력(慧力)이 지은 것이다. 후에 사문 안세고가 공정호(䢼亭湖) 사당의 보물로 수리하였다.” 그러나 도안(道安) 법사는 여러 경을 교열하고 나서 번역한 경들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기록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漢)나라 환제(桓帝) 건화(建和) 2년에서부터 진(晋)나라 태강(太康) 말에 이르기까지는 모두 140여 년이 된다. 만약 안세고가 장수하였다면 혹 이와 같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째서인가? 강승회는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을 주석한 책의 서문에서 말한다. “이 경은 안세고가 낸 것이지만,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 마침 남양(南陽)의 한림(韓林)과 영천(穎川)의 문업(文業), 회계(會稽)의 진혜(陳慧)란 사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의 현인(賢人)은 독실하고 빈틈없이 도를 믿었다. 함 께 모여서 서로에게 가르침을 청하였다. 이에 진혜(陳慧)의 뜻으로 미루어 나는 그 내용을 짐작하였다.” 얼마 안 되어 강승회는 진(晋)나라 태강(太康) 원년(元年, 280)에 돌아가셨다 . 그런데도 이미 “이 경은 나온 뒤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었다”고 하였다. 또 안세고가 봉했던 상자에 나타난 글자에도 “내 도를 높일 사람은 진혜(陳慧)요, 『선경』을 전할 사람은 비구 승회이다”라고 하였다. 『안반수의경』에서 분명히 한 바는 선업(禪業)을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 봉함의 기록이 참으로 허무맹랑하게 조작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미 두 사람에게 바야흐로 불도(佛道)를 전한다고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안세고가 강승회와 더불어 세상을 함께 했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또 『별전(別傳)』에서는 스스로 말한다. 『선경(禪經)』을 전할 이는 비구 승회이다.” 승회는 이미 태강 초에 죽었다. 그러니 어찌 태강 말에 안후 도인이 살아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앞뒤의 말이 스스로 모순되거늘, 한 책에서 진(晋)나라 초(初)를 잘못 가리킨 것을 그대로 좇았다. 이로부터 후세의 여러 작자들이, 혹은 태강(太康)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오(吳)나라 말기라고도 하여 부화뇌동해서 덩달아 다투니,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이미 진(晋)나라 초라는 주장은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도 『담종기(曇宗記)』에는 “ 진(晋)나라 애제(哀帝) 때 안세고가 바야흐로 다시 절을 수리하였다”라고 하였다. 그 잘못된 설이 지나쳐도 너무나 동떨어졌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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