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향기

물질 명예 끄달리지 말고 마음자리 찾으십시오

불암산 2011. 8. 11. 19:53

      “깨달음 향한 정진엔 대신심 대원력 갖춰야” - - 물질 명예 끄달리지 말고 마음자리 찾으십시오 혜정스님 이 세상에 수십억 인구가 살고 있지만 같은 불자가 되어 성불의 길을 가겠다는 같은 목적으로 한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은 다겁으로 지은 인연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처럼 다겁의 인연으로 부처님의 법을 배우는 불자들은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것을 실천에 옮겨 보려고 밤낮없이 노력하고 있지만 생각하는 것처럼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이것은 다겁으로 지은 업장(무명)이 마음의 본심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명을 제거하고 마음의 본심을 깨달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더 졸음이 오고 온갖 망상이 끊임없이 일어나 수행의 장애가 됩니다. 저는 확철대오한 부처님이나 옛조사들과 같은 깨달음을 증득해 보겠다는 일념으로 몇년전 봉암사에 입산, 주야로 정진을 한적이 있습니다. 행주좌와 모든 생활속에서 항상 화두에 대한 의심을 놓지 않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습니다. 언젠가는 가야할 길이기에 빨리가서 조사와 같은 스님이 되어 보겠다는 발심을 한 것이지요. 깨달음을 향한 정진에 있어서는 교학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원력과 확고부동한 신심이 중요하다는 것을 몇년간의 수행을 통해 자연스럽게 얻게 되었습니다. 또한 참선을 행하는데 있어서 우주에 꽉차는 의심도 가져야 합니다. 한마디로 수행이 얼마나 잘되고 안되고의 문제는 신심이 좌우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수행정진하는데 있어 돈독한 신심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번뇌망상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장애의 구렁텅이로 빠질 뿐입니다. 이처럼 정진하는데 있어서 신심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신심이 뒷받침 안되는 수행정진은 깨달음을 향한 진정한 수행이라 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심을 바탕으로 화두에 대한 의심을 지속적으로 해 갈때 그 의심덩어리는 깨어지고 깨달음을 증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옛 조사스님들의 수행 발자취를 보면 구봉스님의 경우 앉거나 서거나 참선에 몰두했지만 불같이 끓어오르는 번뇌망상과 졸음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구봉스님은 돌을 등에 짊어지고 용맹정진을 하였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옛 조사스님이나 선지식들께서 용맹정진하시던 확고한 정신과 수행의 방법을 따르면 깨달음의 길은 결코 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왜 중생들은 마음의 근본자리인 불성을 찾지 못하고 이 모양 이 꼴입니까. 그것은 삿된 욕망에 끄달려 올바른 수행의 방법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들과 같은 용맹정진을 해야 합니다. 이러한 수행을 하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고 무명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고도의 정보화 시대로 치닫고 있는 요즈음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혹시 자신도 모르게 물질문명에 끄달려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물론 물질문명의 발달에 따라 수행에 장애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집착해서는 안됩니다. 모든 불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만족하거나 안주해서도 안됩니다. 고도의 물질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더욱더 자신의 본래 마음자리를 찾아야 하고 초월해야 합니다. 즉 물질을 보고, 듣고 하는 것을 뛰어 넘어 정진을 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들을 다보고, 들을 것 다듣고 온갖 생각 다하고 한가롭게 앉아 언제 조사스님들과 같은 정진을 하며 깨달음을 얻겠습니까. 그래서 정진하는데는 대원력과 대신심이 강하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신심이 없는 정진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화두를 하면 반드시 성불 하겠다’ 는 확고하게 믿는 마음이 선행돼야 합니다. 공안을 참구하는데 있어서도 망상이 생긴다든지 과연 이것이 부처가 되는 자리인가 하고 믿는 마음이 헤이해져 버리면 그것은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수행하기에 앞서 견고한 신심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신심이 견고해야 수행의 과정 속에서 한치의 흔들림이 없는 참수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신심을 바탕으로 참선만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회장에서 항상 사홍서원을 하는 것처럼 수행자는 반드시 커다란 원을 세워야 합니다. 사홍서원 가운데 ‘중생을 다 구제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큰 발원입니다. 곧 부처님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입니다. 이러한 논리적 구조 속에서 중생이 없으면 부처님도 없다는 뜻이지요. 이 세상에는 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야 합니다. 나만 잘되고 나만 깨달으면 그만이다 라고 하는 생각은 소승적인 마음이 아닐까요. 부처님을 믿고 신행하는 불자라면 깨달음을 얻어 사바세계 모든 중생을 다 건지겠다는 대승적인 발원을 세워야 합니다.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서원을 세우고 내가 어떻게 하면 대승보살도를 깨달을 것인지 항상 참구해야 합니다. 또한 중생의 근기에 맞는 교화 방법을 계발하겠다는 발원도 해야 합니다. 정진할 때는 쓸모없는 사람이 돼야 합니다. 지금 사람들은 너무나 쓸모가 많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다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써 자기가 제일 잘났고 자기 아니면 안된다는 사견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이런 사견에 물들어 천상천하유아독존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처럼 마음이 오염될대로 오염되면 산천도 오염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화엄경에서는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하다’고 했습니다. 정진하는데 있어서도 마음이 청정해야 되고 그런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참된 정진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할 것 다하고 누릴것 다 누리면 할일은 언제 하며 언제 공부합니까. 우리가 할일은 오직 깨달음을 위한 참선 공부 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해야만 참으로 큰일을 마치는 것입니다. 이밖에 다른 모든 것은 일이 아닙니다. 단지 이 몸뚱이를 보존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 물체로서 영원한 것이 있습니까.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나 됩니까. 이 몸뚱이를 지탱하는 시간은 제한되어 있는데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시간을 의미없이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습니까. 혹시 몇백년 몇천년 살 것 같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불교를 신행하는 불자들은 업으로 태어나거나 업에 끄달려서는 절대 안됩니다. 업을 자유자재 하게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원생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안됩니다. 업으로 죄 지은 사람이 무슨 자유가 있겠습니까. 업으로 끄달린 사람이 어디에 태어날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최소한 불법이 있는 좋은 국토에 태어나고 좋은 인연, 좋은 스승, 좋은 도반, 좋은 부모를 만나야 하는데 견고한 신심과 원력이 밑바탕이 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정립되지 않는다면 정진이 잘되는 것은 고사하고 안심입명도 되기 힘듭니다. 여러분 시간을 돈으로 살 수 있겠습니까. 보물로 살 수 있겠습니까. 시간은 흐르면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 명예의 노예가 되어 늘 주야로 끄달리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십시요. 특히 수행자라면 탐진치의 삼독심을 버리고 정진해서 깨달음을 얻고 중생을 교화해야 합니다. 수행의 궁극적인 목적이 여기에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교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합니다. 오늘 내가 여러분에게 법문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법문이라고 하는 것은 법을 깨달은 후 하는 것입니다. 또한 법을 알아야 법을 설할 수 있고 제대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제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다같이 수행해가는 도반의 입장에서 서로 격려하는 말을 몇마디 하는 것 뿐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은 몇천년 몇억년을 지나도 절대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물체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해갑니다. 절대로 영원성이 없습니다. 그런데 물질에 얽매어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때에 따라서는 물질도 필요하겠지만 너무 얽매여서 꼭 해야할 목적과 방편이 정립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대자유인이 될 때 비로소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깨닫지 못한 경계에서는 생활이 불안하고 마음이 불안하고 안정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 돈이 없다고 고민하십니까. 돈이 모든 것을 해결하고 돈만 많으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사실 돈 많은 사람이 더 괴롭고 고민이 많습니다. 없는 사람은 없어서 고민하는 반면 있는 사람은 있어서 걱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세상을 고통의 바다라고 했고 고해중생을 건지려고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것입니다. 때문에 불자들은 부처님께 늘 무한한 감사와 고마움을 가져야 합니다. 조사들도 ‘가령 부처님을 머리에 이고 몸은 상이 되어 삼천대천세계에 두루하더라도 중생을 제도하지 못하면 부처님의 은혜를 갚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부처님의 법을 설하고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법을 알아야지 깨닫지 못하면 교화 할 수 없습니다. 정진할 때는 모든 것을 놓고 다 비워야 합니다. 비워야 한다는 생각조차도 비워서 하나의 의심덩어리가 우주에 꽉차고 견고한 신심을 발휘해야 뜻한 마음자리를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불자들은 불국토를 실현하는데 밑거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해 훌륭한 마음, 나라를 위하는 마음, 중생을 위하는 마음을 항상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이러한 보살의 마음이 충만해 졌을때 이 세계는 불국정토가 되는 것입니다. *모셔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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