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력신앙은 불교아니다
대효스님
불법에는 나 자신이 무한한 지혜를 갖추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법은 부처님이 설하셨지만 부처님이 만든 것은 아닙니다.
이미 있는 법을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고 들려주신 것입니다.
마치 우리네 할머니가 손자를 곁에 앉히고
옛날에 들었던 동화를 재밌고
알아듣기 쉽게 들려주듯 말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있는 법을 아셨을 뿐
한 법이라도 만들거나 고친 것이 아닙니다.
법은 어느 누구도 바꾸거나 고칠 수 없습니다.
그 법을 아신 분이 바로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바로 ‘중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법을 안다고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있는 이 법을 알아서 쓸 수 있는 분이 깨달은 분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에 의지하라.
그리고 법에 의지하라”고 설하셨습니다.
지혜가 넓어지면 번뇌는 엷어지고,
번뇌가 엷어지면 지혜는 깊어져서 넓고
깊은 지혜는 맑고 밝아 사물을 바로 보게 합니다.
먼저 내 자신을 바로 보면
상대적으로 내가 대하는 대상인 이 세상과
내가 하는 일은 나를 구속하지도
해탈시키지도 않는 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와 남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나의 대상 즉 내가 상대하는 세상, 나와 일, 관념등
모든 대상이 나눠져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관이 없으면,
나를 상대하는 대상인 객관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와 세상은 갈라지려
해도 갈라질 수 없습니다.
나와 남, 나와 세상을 가르는 것은 무지의 소치입니다.
나와 남을 가르는 것은
실상이 아니고 실재가 아니며 현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악은 물론이요 선도 버려야 악을 해결합니다.
증오(憎惡)와 사랑을
함께 버려야 갈등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이지요.
이 곳을 떠나서 저 곳으로 갈 곳이 있다면,
이 곳과 저 곳을 가르는 것이니,
이 또한 불교의 원리에 어긋납니다.
서방정토를 갈 곳이라고 한다면 불교가 아니며,
구하고 구할 대상으로서
불보살을 의지처로 삼는 것 역시 불교가 될 수 없습니다.
타력신앙을 강조하는 한 바른 불교가 있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불교에서 염불, 주력이
너무 타력신앙으로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많은 불자들이 의지처로 삼는 내로라하는 스님들도 그렇게 가르치는데
감히 누가 나서서 거역하겠는가?”라는 이유로
무조건 염불만을 권하는 것이 불자
자신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일까요?
그러나 불법의 원리는 한 시대 스님들의
말에 있기보다 법에 근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관과 객관을 갈라놓고 출발하는 것 자체가
불교의 지혜에 반하는 것이며,
이런 삼매는 바른 삼매가 되지 못하며,
삿(邪)된 삼매는 지혜로 나아가는
길을 막습니다.
집착에 빠져있으면 욕망을 성취하려는 자극에 쉽게 넘어가
신비와 초월적인 힘에 매료되기 십상입니다.
지혜의 종자를 말살하니 자신을
어리석고 무력하며
보잘것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비하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나머지 외적 욕망으로 충족하고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형성되게 됩니다.
또 그런 눈으로 대상을 가름합니다.
타력신앙의 풍토가 지배하는 오늘날에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가치인들 그 빛을 발할 수 있을까요?
현대 사회가 목마르게 기다리고 바라는 불교는타력신앙이 아닙니다.
*모셔온글*
솔향기 풍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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