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향기

아집 내세우고 살면 ‘부처님 바다’못들어가

불암산 2011. 10. 3. 08:41

      아집 내세우고 살면 ‘부처님 바다’못들어가” - - 생로병사 없는 본래면목‘無’의자성깨달아야 청하스님 天地者 萬物之逆旅요 光陰者 百代之過客이라 우주천지라 하는 것은 만물이 다 쉬어 가는 객사요 광음(세월)이라는 것은 백년 동안 쉬어가는 나그네 일 따름이라. 浮生이 若夢하니 爲歡幾何오 뜬구름과 같은 삶이 마치 꿈과 같으니 즐거움으로 삼을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꿈과 같은 이 사바세계에서 잠시 쉬는 동안에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 하늘과 땅이 나뉘어지기 이전, 자기 어머니 뱃속에서 나오기 이전의 참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이 소식을 알았으면 여러분들은 오늘 뜻깊은 날이지만 이 소식을 미처 깨닫지 못했으면 더욱 더 용맹정진 하셔야 합니다. 결제, 해제가 본래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발심할 때가 결제요, 성불할 때가 곧 해제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요식으로 ‘해제’했다고 해서 본래면목의 일을 마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도저히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으로도 전혀 알 수 없는, 자기의 본래면목이라는 것은 물건이나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형상으로 나타날 수도 없고, 눈으로 볼 수도 없기 때문에 공부를잘 했는지 못했는지, 얼마나 그 경지가 향상되었는지, 겉으로 보아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자증자득(自證自得)이라 자기 스스로 깨닫고 자기 스스로 얻어야지 무슨 물체가 있어서 나타나는 것도 아니며, 일찌기 알 수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여러분 스스로 각자가 과연 삼계를 초출(超出)하고 자기 본래 면목을 증득했는가를 자기 자성에게 회광반조해서 깊이 통찰하고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시간이 많이 경과했다든지, 안거를 많이 했다든지 하는 형식에서 이것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육조스님은 나무를 베어팔고, 방아를 찧어 가면서도 자기의 본래 면목을 깨달아 증득했습니다. 부처님이 마하 가섭에게 전한 이심전심(以心傳心) 교외별전(敎外別傳) 삼처전심(三處專心) 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여러분들께서는 스스로 정진하시어 대오각성하셔야 합니다. 자기가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리 부처님과 삼세제불이 출현해도 이것은 어쩔 수 없고, 역대 제대조사가 출현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가 깨닫지 않으면 과학으로나 물질문명도 이 도리는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금강경에 이르기를 ‘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이라 했습니다. 가히 얻는다고 하나 본래 얻을 것도 없는 것이라 했습니다. 본래 좌선이라는 것은 육조 혜능스님으로부터 내려오는 조계문중의 이심전심에서 비롯된 것 입니다. 육조스님께서는 상이 있는 의발을 전해 받은 분이지만 스님께서는 의발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상에 끄달리는 중생이 형식에 집착해 파벌이 생기고 그로 인해 과오가 생기므로 형식을 전하지 말고 이심전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스님 이후에는 의발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문에서는 설교보다는 불립문자 견성성불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많은 설교를 부정하고 있습니다만 몇가지 주된 법문을 소개하면 임제조계 법문인데, 임제의 할, 덕산의 30방입니다. 즉 모든 물음에 대해 알아도 30방, 몰라도 30방이고,조주의 다(茶) 즉 조주에게 법문을 청하는 모든 이에게 ‘차나 한잔 마시게’하여 법문이 끝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로써 본래 그 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에 여하시본래면목(如何是本來面目)이닛고, “부모님의 몸에서 태어나기 이전에는 어떤것이 본래의 참 모습인가” 이를 깨달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계속해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또 불교에서는 유위법과 무위법이 있는데 형식 형상 모양이 있는 유위법이라 하며 세상의 법은 모두 이 유위법입니다. 불교에서는 이 유위법으로 공부하는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것, 형식 형상이 없는 무위법으로 공부합니다. 법도 무위법이요, 설법도 무설이라.설하는 것으로 알아야 하지만 설하지 않는 것으로도 알아야 합니다. 이 몸도 본래 없는 곳에서 왔지 있는 곳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또한 괴로움은 우리 자성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로병사도 없는 것인 바 우리는 무(無)를 깨달아야 합니다. 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고 공한 것입니다. 허공은 비어있지만 진정 비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진공묘유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무라는 것은 볼래야 볼 수 없고 들을래야 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에서 맴돌고 있습니다. 법계선근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즉 화엄경에서 말하는 것은 법신이 대지와 우주 삼라만상 전체가 비로자나의 몸체입니다. 비로자나 전신은 화엄경에서 말씀하신 지혜의 바다인 해인삼매입니다. 화엄경의 해인삼매라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바다가 아니고 바다와 같이 깊고 한량없는 삼매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구는 부처님의 비로자나 삼매 속에서 모두 다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로자나 부처님의 광명을 받아서 문수보살로 부터 보현보살로 회향할 제, 보현보살은 비로자나 부처님의 대변자요 비로자나 부처님의 광명을 받아서 보현보살이 삼매에 들어서 설법을 하시는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어째서 발심을 했습니까? 선재동자와 같은 이웃에 똑같은 나이 일곱살 먹은 동자가 셋이 있었는데 일주일 전에 한사람 죽고 또 일주일 전에 한사람이 죽고 이번에는 선재동자가 병으로써 죽을 날이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도 일주일전에 여러분의 이웃이나 친구나 가족이 죽었을 것입니다. 또 앞으로 일주일 후에 여기있는 사람도 그 중에 누가 이 세상에서 생멸의 무상, 그 늪으로 빠져들고 또 앞으로 일주일, 1백년 후에는 여기있는 사람 모두가 이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이 사바세계는 물론 대한민국에도 없습니다. 그때는 여러분이 어디에 가 계실까요. 여러분은 살다가 늙고, 늙다가 병들고 죽는 이 생사의 늪에서 참으로 부처님의 비로자나 전신, 그 법성체에 귀의 할 뿐만 아니라 거기서 생사를 초월한 진여에서 살지 않으면 다시는 이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화엄경에는 우리의 육신을 떠나고 우리의 이러한 형상의 세계, 무상의 세계를 떠나서 부처님의 해인삼매 속,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서 영겁토록 죽지 않는 우리의 삼먁삼보리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선재동자는 문수보살의 설법을 듣고 발심해서 부처님의 법계에서 부처님의 크고 넓은 진리를 구하고 생사의 바다에서 헤엄쳐 무생법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엄산림의 회향은 회향이라 하는 실제회향, 중생회향, 법계회향과 여기에 실제 동참하신 여러분과 여러 영단의 위패와 그동안 기도 드리고 설법 을 듣던 분들과 또 그 원력이 남고 그 법력이 넘쳐서 모든 중생계에 미치고 그러고도 남으면 법계, 이 우주에 가득찹니다. 고루고루 부처님은 평등하게 널리 회향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화엄산림의 회향이요, 우리 선가에서는 반 산림이라 합니다. 법신(法身)은 항적정(恒寂靜)하고, 청정(淸淨)은 무위상(無爲常)이로다. 법신자리는 말로 소리로 내는 것이 아니라 음성을 가지고 그것을 가리킬 수도 없고, 상이나 모양을 가지고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침묵은 대변제라 항상 적정하고 고요한 가운데서 대우주는 침묵하면서도 큰 변제를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봄에는 봄법문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법문을 하고 추우면 바람소리, 물소리, 저 단풍잎도 대 자연의 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 않아 법문을 하는 것은 거기에 비하면 백분의, 천분의, 만분의 일도 거기에 속하지 못합니다. 대 자연은 침묵으로써 말도, 색상도 없고 형상 도 없이 그림자가 없는 그러한 침묵의 적멸의 법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법문을 들을 줄 모르고 들어도 알지 못합니다. 생사의 굴레에서 육도중생을 위해서 항상 비로자나 부처님은 상주설법을 하고 있습니다. 그와같이 보리수 아래에서 정각을 이룬 부처님의 껍데기 옷을 보았지 부처님의 자성자리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선사는 선사의 옷을 보고, 남자는 남자의 옷을 보고, 여자는 여자의 옷을 보고, 군인은 군대의 군복을 보고, 경찰은 경관의 복색을 보고,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만약 군인이 군복을 벗고, 경관이 경관의 옷을 벗고, 여자가 여자의 옷을 벗고, 남자가 남자의 옷을 벗고, 모두 벌거벗고 일어서면 똑같습니다. 부처님의 체상은 똑같습니다. 선사나 부처님이나 달마나 그 체성, 진여의 체는 똑같습니다. 이 지구의 인구가 다 벌거벗고 나오면 몸은 똑같습니다. 서양사람, 동양사람이 머리깎고 이 자리에 서면 하나도 다를게 없습니다. 비로자나 부처님의 진여의 체성은 이와 마찬가지로 정말로 똑같습니다. 평등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병에든 얼음은 병처럼 생겼고 고드름은 히말라야 설산처럼 생긴 것처럼 각기 그 모양은 다르지만 만약 그 물이 녹으면 그 모양이 하나도 다를게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있는 눈이, 얼음이 다 녹으면 똑같은 물로 되듯 진여도 똑같습니다. 대한민국의 물이 다르고 서양의 물이 다르고 미시시피강의 물이 다르고 갠지스 강의 물이 다릅니까? 다 같습니다. 대해에 들어가면 성인이나 범부나 그 일체는 모두 똑같습니다. 우리가 화엄경에서 말하는 진여에 들어 선재동자와 같이 법계에 들어가면 선재동자의 자성이나 우리의 자성이나 중생의 자성이나 부처님의 자성이나 법성은 똑같습니다. 이것이 해인삼매입니다. 겉모양 보고 형상을 보고 그 형상의 그림자를 보면 그림자는 다르지만 해가지면 그림자는 없습니다. 비로자나 광명의 빛을 받아서 설법하는 53선지식이 마치 해가 동쪽에 뜨면 햇빛을 받아서 산도 보고 들도 보고 물도 보고 집도 보고 빌딩도 보고 차도 보고하지, 만일 햇빛을 받지 못하면 분별이 없고 모양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태양이 뜨지 않으면 캄캄한 허공지옥입니다. 그러나 태양이 뜨면 그 빛을 받아서 모든 것이 보입니다. 그와같이 부처님의 광명을 받아서 삼매에 들고 설법을 하는 것이고, 모든 보살은 부처님의 신력과 광명을 받아서 설법하고 중생을 제도합니다. 모든 부처님은 항상 중생을 슬피여기고 중생을 어여쁘게 여기지만 중생은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상념자(常念子)해도 자(子)는 불염부모(不念父母)라 부모는 항상 어린자식을 걱정하고 생각해도 자식은 부모를 생각 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와같이 모든 제불은 중생을 위해서 모양을 바꾸시고 태어나시고 생사를 보이시지 중생을 위하지 않으면 부처님이 시현하지 않고 역대 조사, 선사도 없습니다. 다 중생을 위해서 모양을 보이시고 시현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 각자의 세계가 자기란 세계 속에서 아집이라는 우물 안의 개구리 처럼 거기에 살고있는 중생은 거기 밖에 모릅니다.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사람은 대한민국 밖에 모릅니다. 이와같이 부처님의 세계는 우리가 가보지 않고는 모릅니다. 우물안 개구리, 그래서 부처님의 넓은 대해 같은 불교의 화엄경의 도리를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고 상상도 못합니다. 이러니까 부처님의 화엄은 너무나 광범해서 듣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어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