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향기

생로병사 극복할 주체적 실현자는 바로 나

불암산 2011. 10. 3. 08:32

      생로병사 극복할 주체적 실현자는 바로 나”- - 망념여의고 청정한 마음 드러나면 생사해탈 - 운경스님 부처님의 출가 의미를 되새기면서 우리도 부처님의 삶을 닮은 새로운 출가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은 어느 시대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인간이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사느냐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났고 세월과 함께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이 인생사입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거부할 수도 없는 일인지라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게 되고 종교에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이고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벗어날 방법을 모색하다가 영원한 자유를 얻기위해 출가란 일상의 규범을 벗어난 강한 의지의 삶을 개척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아무런 고통이나 문제가 없다면 얼마나 다행이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중생의 삶이란 많은 문제와 갈등이 있게 마련이고 답답하고 괴로운 일들이 많습니다. 인간의 모든 노력이란 고통 많은 중생계에 살면서도 그 고통에 빠져 살지 않으려고 공을 들이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애써 들인 공이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는 길과는 거리가 멀다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그대로 고집하면서 나의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내 편한대로 바뀌길 바란다면 헛되이 애만 쓰게 될 뿐입니다. 모든 문제의 원인에 대해 바르게 인식하고 받아들여 마음을 돌이키면 큰 변화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가피력입니다. 수행하는 바른 자세는 나의 고통을 누군가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거나 바라지 말고 진정 내 자신의 문제는 내 자신이 풀어갈 주체임을 자각하는 길입니다. 자기 자신이 주인이어서 어떤 절대자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지은 만큼 받는 철저한 인과를 인식하는 것만이 자기의 근원적인 주체인 것입니다. 불법은 깨달음의 종교이고 부처님은 진리를 깨달은 분입니다. 여기서 깨달음은 근원적인 진리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진리는 부처님과 같이 특정인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런 경계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원래도 갖추고 있는 참 모습인 진리 그대로의 완전 실현인 것입니다. 부처님은 진리의 주체적 실현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불자들의 원력 또한 불법의 실현에 있습니다. 이법은 부처님이라고 해서 더한것이 없고 중생이라 해서 못한 것이 없는데 왜 우리는 부처님과 다르겠습니까? 부처님은 진리를 보시고 진리 자체가 되어 진리 그대로 사셨지만 중생은 진리를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생들은 진리인지 모른채 살고 진리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모릅니다. 푸른 하늘 가운데서 태양을 보지 못하고 어둠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같은 허공 속에 있어도 부처님은 자재한 삶, 중생들은 속박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행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지요. 불법을 행해서 깨달음에 들어와야 합니다. ‘너의 자성을 깨달아라’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자성의 청정을 깨달으면 천지만물이 나와 한몸이요, 미혹하면 중생세계입니다. 스스로 망념의 변화에 의하여 인간세계, 천상세계, 귀신세계, 물질세계가 일어나고 망념을 여의고 본래 청정한 마음이 드러나면 바로 생사를 해탈한 진리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모든 사물은 인연에 따라 서로 관련되어서 존재한다는 상의 상관의 논리에 따라 모든 것을 스스로 사고하고 스스로 깨달아 가는 지성의 종교인 만큼 자칫 불교가 어렵다고 느낄 수 있으나 선입견을 버리고 잘 들여다 보면 매우 조리있고 자연스럽게 정돈된 종교입니다. 마치 잘 정리된 실타래와 같아서 첫걸음을 정확하게 딛으면 무리없이 쉽게 풀릴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參禪卽念佛 참선이 곧 염불이요. 念佛卽參禪 염불이 곧 참선일세 本性無方便 본래 성품은 방편도 없는 것 昭性寂寂然가장 밝고도 고요하여라. 불교를 행하는데는 여러 종류의 다양한 방편이 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참선과 염불이 있습니다. 참선은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구경의 목적인 불과(佛果)를 얻는 자력주의(自力主義)이며 염불은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공덕과 지혜, 원력을 절대적으로 믿는 타력주의(他力主義)입니다. 수행방법이 여하튼 목표는 마음을 밝혀서 거울같이 맑은 심성의 본체를 깨달아 부처님의 마음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화엄경 십현담에 보면 마음을 넓게 열면 마음 밖에 따로 경계가 있을 수 없고 경계를 널리 펴면 또 경계 밖에 따로 마음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은 경계를 떠나서 있을 수 없으므로 마음과 경계가 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마음을 맑혀 청정본성을 밝게 드러내고 부처님의 진리의 생명인 법성광명이 오롯하게 드러나는 것이며 부처님 진리의 무한한 지혜가 내 마음에 온전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참선은 별스러운게 아닙니다. 모든 생각을 집중하면 마음이 밝아 오고 정신 이 맑아져 매사에 판단도 맑게 되는 것이 바로 참선의 이치입니다. 평소 우리 마음은 탐, 진, 치 삼독의 그림자가 가려져 마음이 맑으면 마치 만상이 거울에 나타나는 그대로 순간순간 비추어 보이듯이 검은 것은 검게 하얀 것은 하얗게 정확하게 비춰줍니다. 거울에 때가 끼면 옳게 비춰 주질 못하듯 마음의 삼독심을 제거하면 본래 마음을 되찾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일심 염불하여 일념이 되고 다시 수행하여 무념경지에 이르러 염불하게 되면 마침내는 일체 경계가 끊어진 경지에 이르러 부처님의 법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참선을 하여 견성성불한다는 것과 염불을 하여 그 정토에 왕생한다는 것이 각각 다른 길 같이 보이지만 결국 한길인 셈입니다. 염불이란 글자 그대로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뜻으로 부처님의 상호(相好)형상을 마음에 가득 담아서 그 공덕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자기자신의 마음을 바르게 닦아 몸(身)과 입(口)과 뜻(意) 삼업의 업장을 소멸함으로써 지혜와 광명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직 한마음으로 시방의 모든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의 32상을 그리면서 염불을 한다면 중생은 극락세계에 왕생한다고 경전에서 설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염불삼매에 들어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색신상호를 생각하고 부처님의 법신을 생각하면 능히 생각한 바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염불은 더러 그 뜻이 와전되어 입으로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석가모니불의 이름을 부르거나 법당에서 스님들이 독경하는 것만을 염불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보살과 진언을 입으로만 외우며 삼매에 드는 그 자체도 염불이지만 염불의 본뜻은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하고 그 공덕을 생각하며 선업을 쌓으므로 하여 그 인(因)의 씨앗이 극락정토에 또는 이 사바세계에 떨어져 다시 하나의 연(緣)으로써 왕생, 내생의 결과와 같은 영원한 기쁨을 얻게 하기 위함입니다. 잡아함경에 염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하였습니다. “성인의 제자는 여래의 일을 염(念)하라. 여래는 응공(應供)등정각(等正覺) 명행족(明行足) 선서(善逝) 세간해(世間解) 무상사(無上士) 조어장부(調御丈夫) 천인사(天人師) 불세존(佛世尊)인 것이다.” 그러므로 여래를 염할 때는 탐욕에 얽힘을 일으키지 않고 그 마음을 정직하게 하여 여래의 모든 일을 생각하면 여래의 뜻을 얻는다. 여래는 바른 법을 위하여 여래가 있는 곳에 항상 기쁜 마음을 얻도록 하여주기 때문이다. 기뻐하는 마음으로써 즐거워하면 몸이 편하고 또 마음이 편하다. 따라서 그 편한몸으로써 그 마음을 한 곳에 머물게 하면 몸은 그 모든 장애없이 법의 흐름에 들어서 열반에 이르지 아니 함이 없다. 이처럼 부처님을 생각하고 탐진치를 일으키지 않고 마음을 바르게 하면 모든 괴로움이 소멸되고 마침내 열반에 다다를 수 있는 것입니다. 자력(自力) 자각(自覺)의 종교인 불교가 어떻게 타력이행의 정토문(他力易行淨土門)인 염불을 주장하는가? 간혹 의문을 가질 수 있으나 미혹 중생은 업장이 무거워서 자력으로 대각성불이나 왕생극락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나보다 수승하고 자비가 많은 불보살의 은혜를 입어야만 한결 용이해 지는 것입니다. 萬緣都放下 온갖 인연 모두 놓아 버리고 常念觀世音 오로지 관세음만을 생각한다면 此是如來禪 이것이 곧 여래선이요 亦爲祖師禪 또한 조사선이 되느니라. 염불에도 보살 육도행의 공과(功果)가 있으니 순일한 마음과 착실한 뜻으로 생각함이 보시행이요, 간절히 염하여 탐함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제거하는 것이 지계행이요, 염불정진하는 사람과 그 차이를 따지지 않음이 인욕행이요, 견고한 일심으로 염불을 끊이지 않게 하는 것이 정진행이요, 마음이 안정된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선정행이요, 마음과 아는 것이 분명한 경지에 도달하여 모든 법을 맑게 볼 수 있게 염불함이 지혜행입니다. 모든 일에 그나름대로 처방이 있듯이 염불을 하는데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정중히 예배하며 부처님의 대비광명과 원만구족함을 항상 마음에 생각하며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선(禪)이 있고 정토가 없으면 열중에 아홉사람은 길을 찾지 못하고, 선은 없으나 정토가 있으면 만 사람이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으면 모두 갈 수 있다”고 영명연수 선사도 말씀하셨습니다. 근기따라 중생들이 불도를 구하는데 있어서 이보다 더 적절하고 넓은 문은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예경하고 염송하여 부처님의 진리공덕이 자신 속에 자리하고 있는가 확인하는 것이 불자의 일상생활의 기본입니다. 요즘 젊은 불자들은 법당에 부처님께 참배도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을 하나의 방편으로 생각하여 방편에 매달리지 말고 직접 부처님의 깨달음에 들어가야 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부처님께 예불하고 공양하지 않으면 불자가 아닙니다. 부처님께 공양한다는 것은 절실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시봉하는 일입니다. 경전을 많이 알고 교리를 많이 안다고 해서 참불자는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불자는 소박하지만 온갖 정성을 다하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존중하는 사람이 신심 깊은 불자입니다. 부처님을 믿고 순수하게 살면 길이 열리며 그 부처님은 어느 타방세계에 계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생명 안에 있는 부처님입니다. 내 생명에 흐르는 부처님의 자비의 화현입니다. 항상 부처님의 공덕이 우리 주변에 넘치고 있는 생명이라고 믿고 의지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