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법문향기

생활속에 움직이는 주체를 참구하십시오

불암산 2007. 6. 14. 21:20
      벽암스님 자비는 무엇이냐. 얼마전에 겪은 얘기 한 토막 들어 보십시오. 이 법당 아래 내가 기거하는 방의 당호가 뭔지 아십니까. ‘심심해서(尋心해서)’ 입니다. 심심해서 그냥 웃자고 지은 이름은 아니고 ‘마음을 찾는 골짜기의 높은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날 심심하게 앉아 있는데 바깥이 시끌덤벙 하더군요. 심심하던차에 밖이 시끄 러우니 나가볼 수 밖에요. 저쪽 한켠에 남자 네명이 앉아 밥이다 찌게다 한껏 끓 이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더군요. 분명 절 안인데 그래서는 안 될 곳임을 알만 한 나이들인데 말입니다. 다가가서 들으니 게중에는 모대학의 교수도 있더군요. 마 침 나는 작업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선생님들 여기는 절 안이니 이렇게 음식 끓여 먹으면 안됩니다. 너무 소란을 피 워서도 안되고요.” “노인은 누구시요” “난 이 절에서 밥 얻어 먹는 사람인데 선생님들 같이 소란피우고 음식해 먹는 사 람들을 내보내지 않으면 쫓겨 납니다.그러니 다른 곳으로…” “여기는 절 아닙니까. 절에서 배고픈 중생이 밥해 먹는다는데 왜 쫓으려 합니까. 절이 자비를 베풀어야지” 대학교수 일행이 자비란 말을 서슴없이 하길래 나는 그들이 앉은 가운데 도사리고 앉았지요. “자비라고 했나요. <법화경> 25품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인데 거기에 ‘응이집 금강신(應以執金剛神)으로 득도자(得道者)는 즉현집금강신(卽現執金剛神)하여 이위 설법(而爲說法)한다’는 말이 있지요. 그 뜻은 금강역사의 무서운 철퇴로 다스려 교화 시킬 사람은 마땅히 금강역사의 철퇴로 법을 가르쳐 깨우치게 한다는 겁니 다. 관세음보살님이 삼십이응신으로 나투어 중생을 제도 하는 것은 중생을 가엾고 어여쁘게 여기는 보살심이 있기 때문이지만 중생이 그에 합당한 모습을 염원하지 않고 죄악으로 살아간다면 거기에 맞춰 철퇴로 다스린다는 겁니다. 그것이 관음보 살님의 자비입니다. 아무나 무조건 봐주고 용서해 주는 것이 자비라면 이 세상에 무슨 질서가 있고 무슨 법이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자비가 조건부라는 것이 아니 고 그 쓰임이 불법에 거스름이 없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미 여러분이 해서는 안될 일을 해 놓고 자비를 말하며 용서 받으려 한다면 금강역사의 철퇴 밖에 드릴 것이 없잖겠습니까. 더 혼나기 전에 어서 나가시지요.” 그들은 아무소리 못하고 절을 나갔는데 뒤에 들으니 저아래 마을에서 “그 영감이 누구냐”고 묻더랍니다. 그리고 “주지스님이다”란 대답을 듣고 다음에 만나서는 “스님 너무하셨어요. 진작 주지스님이라고 말씀하셨으면….”하더군요. 그래서 나 는 “주지 말은 듣고 집지킴이 노인네 말은 안듣는 그 마음은 이미 진리와 거리가 멀구먼”하고 다시 한마디 했습니다. 자비를 잘못 이해하면 이런 웃지 못할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 자신 에게 자비를 베풀 줄 알면 남에게도 자비로운 사람이 됩니다. 자신에게 자비를 베 푸는 길이 곧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지킬 계가 다섯가지 있음은 다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그 다섯가지는 동양인이 희구하는 오복(五福)과도 상통하 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모든 과정에서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닐까요. 오계의 처음은 불살생이고 오복의 처음은 수(壽)입니다. 오래 살길 바라는 것은 인 간의 당연한 욕심입니다. 내가 오래살길 바란다면 다른 생명도 오래 잘 살도록 해 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연법이 그걸 말해주는 것이고요. 그래서 불살생계를 지키라는 겁니다. 남의 생명을 함부로 하면서 나는 오래 잘 살고 싶다는 생각은 실현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살생을 삼가해서 나도 오래 살고 축생미물도 수명을 다 하도록 하자는 겁니다. 오계의 두번째는 불투도이고 오복의 두번째는 부(富)입니 다. 도둑질해서 부자 됐다는 사람 보셨습니까. 그런 사람은 있을 수 없습니다. 도 둑질을 해서 한순간은 잘 살 수 있을지 몰라도 결국 그 업장으로 그는 파멸하고 맙니다. 도둑질 하지 말라는 것은 남의것을 탐내는 마음도 갖지 말고 행위도 하지 말라는 겁니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맛있어 보일지라도 남의 것은 남의 것으로 존중해 주고 나의 것은 나의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 요. 그래야 나는 내 노력만큼의 부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니까요. 노력한 것은 적고 가지려는 욕심은 크다면 세상은 혼란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계의 세번째는 불사음이고 오복의 세번째는 귀(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귀한 모습으로 살고 싶어 합니다. 귀하다는 것은 아무렇게나 흐트러지지 않는 격조가 있고 함부로 여기지 못할 품위가 있다는 것이겠지요. 귀하지 않은 것은 천한 것이 고 그것은 스스로의 생존가치를 경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누구나 귀한 존재로 세상을 살고 싶어 하는 겁니다. 스스로 귀한 존재가치를 지니기 위해 서 불교에서는 불사음의 계를 지키라고 가르칩니다. 삿된 생각과 행동은 이웃과의 화합을 깨뜨리고 사회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인간사회는 그 사회마다의 법이 있고 규칙이 있습니다. 특히 남녀간의 문제에 있어서는 사회 집단마다 독특한 전통과 가치관을 갖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녀유별의 정신적 전통은 꾸준히 지켜 져 왔습니다. 이런 가치관의 전래가 요즘은 크게 혼란스러워지는 것같습니다. 아무 리 사회가 개방화되고 남녀평등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높아져도 지켜질 것은 지켜 져야 합니다. 전통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자유가 아니고 평등이 아닙니다. 개인개인 이 귀해질때 사회도 귀해지고 법계가 귀해집니다. 다음의 계율은 불망어이고 오복의 네번째는 덕(德)입니다. 덕망이 있는 사람은 함 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한 말에 대해 책임을 질 줄도 압니다. 덕을 채우는 행위 가운데 말을 잘하고 잘 지키는 것이 매우 큰 비중을 갖는 것입니다. 도둑질 하는 사람이 잘 살 수 없듯이 거짓말 하는 사람도 잘 살 수 없습니다. 거 짓말은 거짓일 뿐이므로 언젠가는 들통이 납나다. 거짓과 진실은 언제나 제 모습 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 가려진 진실이 후일 언젠가 밝혀지듯 지금은 성공 한 거짓말일지라도 반드시 그 허상은 드러나는 겁니다. 진실은 하늘이고 거짓은 구름이라고 하면 어떨런지요. 불망어의 계를 잘 지키면 스스로 덕이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아무리 덕성스런 행동을 해도 덕을 갖추지 못합니 다. 말을 신중히 하고 말을 아낄 줄 아는 지혜는 그 사람의 덕이 될 것입니다. 오계의 마지막은 불음주이고 오복의 마지막은 명, 고종명(考終命)이라 합니다. 불 음주는 재가불자들에게 매우 곤혹스런 계율이라 인식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주 안마시고 살 수야 있겠습니까. 술을 마시되 약이 되도록 마셔야지 독이 되게 마셔 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술을 먹는 차원을 넘어 술이 술을 먹고 술이 사람 을 먹는 지경에까지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가급적이면 마시지 말것이며 마셔 야 할 때는 자신의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범위에서 마셔 남에게 피해를 주어서 는 안될 것입니다. 고종명이란 목숨을 다하는 순간에 후회가 없어야 한다는 것인 데 이것이 불음주계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상관이 있습니다. 음주운전 으로 사고를 내고 비명에 목숨을 잃는 사람을 말하지 않더라도 술이 화근이 되어 가정을 불화하게 하고 인간관계를 반목케 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신의 삶을 헛되지 않게하기 위해서는 술 마시는 일을 스스로 잘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계율이란 지키기 힘든 것입니다. 쉽다면 굳이 계율로 삼아 지키라고 강조 할 이유 도 없겠지요. 지키기 어려워도 지켜야 하고 그래야 참다운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지키려고 노력하는 데서 이미 삶의 지혜는 솟아납니다. 실천할 수 있을때 실천 함으로 이미 자비로운 불자로 변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 계를 둘로 볼 것도 아닙니다. 다섯가지 계를 지키는 마음도 자비에서 비롯되는 것 입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말을 앞에서 했듯이 스스로 계를 지 키는 것은 자신에 대한 자비행일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집안이 법당이고 세상이 도량입니다. 자비심을 갖추고 자비행을 실천하며 이 도량 을 청정히 가꾸는 일에 게으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도량이야 말로 성불의 도량 이니까요. 억지로 계율에 얽매여서도 안되고 솟아 오르는 화를 억지로 참아 병을 키워서도 안됩니다. 발보살심하는 그 순간에 모든 일에 자비로워지는 지혜를 얻을 것이니 여여(如如)하게 마음속의 자비를 실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