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장

識의 움직임 통해 마음은 드러난다

불암산 2011. 8. 21. 16:45

      識의 움직임 통해 마음은 드러난다 진리를 깨닫게 되면 불안(佛眼) 혹은 심지법안(心地法眼)을 갖춘다고 하듯이 깨달은 마음을 흔히 눈에 비유한다. 마찬가지로 선(禪)에서 자기의 ‘마음’을 찾는 것을 자기의 ‘눈’을 찾는 것에 비유하여 살펴보면 이해하기가 한결 쉽다. 나에게 눈이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나에게 ‘눈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가장 분명한 사실은 내가 사물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눈은 늘 밖을 볼 수 있을 뿐이고 자기 스스로를 보지는 못한다. 스스로를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이 자기의 존재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다른 무언가를 ‘본다’는 사실을 통해서이다. 만약 자기 눈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눈의 존재를 직접 확인시키는 유일한 길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어 ‘본다’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이다. 연필이든 칼이든 산이든 물이든 어떤 모습이라도 보여주고 보게되면 그것이 그의 눈이 있다는 증거가 된다. 여기에 보여줄 모습이 특별히 정해져 있을 수는 없다. 즉 보이는 모습은 무엇이든 눈의 존재를 확인하는 방편이 된다. 그러나 어떤 모습도 보이는 모습이 눈을 이렇게 저렇게 규정할 수는 없다. 보이는 모습은 단지 ‘본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인연(因緣)일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눈’이 ‘본다’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되듯이, ‘마음’은 ‘안다[識]’는 사실에 의하여 입증된다. 세계는 마음에서 알려진다[萬法唯識]. 그런데 마음은 눈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알 수가 없다. 다만 경험되는 것은 내면에서나 외면에서나 끊임 없이 생멸변화하는 식(識)뿐이다. 이처럼 지금 생멸변화하는 식의 움직임을 통하여 마음은 드러나고 있다. 말하자면 식은 순간 순간 생멸하며 지나가는 현상에 불과하지만, 현상이라는 모습을 벗어날 수 있다면(현상이라는 모습에 머물지 않을 수 있다면) 모습이 아닌 순수한 생멸변화의 움직임을 알 수 있는데, 이 순수한 움직임에게 마음 혹은 자성(自性)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이 움직임은 현상[色]과 별개의 것은 아니지만[不二] 현상이라는 모습만 보고 있다면 이 움직임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 움직임에게 공(空)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므로 공은 색이 사라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색의 다른 성질을 일컫는 말이다. 나[我]는 항상 식의 움직임을 경험할 뿐, 식의 움직임이 정지된 상황은 경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식의 정지’ 혹은 ‘절대무(絶對無)’라는 말의 의미도 식의 움직임에 의하여 나타나는 식의 현상일 뿐이다. 즉 ‘식의 정지’ ‘절대무’는 ‘식의 활동’ ‘절대유’의 상대개념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은 색을 통하여 파악될 수밖에 없다. 즉 현상(識=色) 속에서 현상의 모양에 막히지 않을 수만 있다면, 현상이 고정된 모양이 아니고 끊임 없는 변화의 움직임 임을 알 수가 있다. 결국 나는 식 속에서 모양 있는 현상[色]이라는 표면을 넘어 식의 작용 혹은 현상의 드러남이라는 이면의 모양 없는 움직임[空]을 깨달을 수가 있다. 물론 표면과 이면은 하나로서 분리할 수 없다. 즉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 색으로는 생멸이 나타나지만 본성은 공이므로 생멸이 없고 생멸이 없으므로 생사(生死)도 없다. 즉 진여자성(眞如自性)에는 생사가 없다. 그러므로 방거사는 마음의 체험을 언급하여 ‘ 다만 있는 것[色]을 모두 비워버리기를 바랄 뿐, 없는 것[空]을 결코 진실하게 여기지 말라’고 한 것이다. 없는 것을 진실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곧 있는 것이 된다. 따라서 마음의 존재를 의심하는 사람에게는 의식(意識)할 수 있는 어떤 방편을 사용하여 식의 움직임을 확인시켜주면 된다. 할(喝)이든 방(棒)이든, 따귀를 치든 뜰 앞의 잣나무라고 말하든, 무엇을 의식시켜서 식의 움직임을 확인시키면 된다. 선사(禪師)의 가르침은 모두 이러한 방편이다. 의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마음을 가리키는 방편이므로, 마음을 확인시키는 특정한 방편은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대혜는 방편을 통해 마음을 파악하지 않고 옛 스님의 가르침을 지키며 따르기만 하는 사람은 영원히 선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모셔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