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 장

일상의 삶 모두가 화두이며 자성

불암산 2011. 8. 21. 17:06

      일상의 삶 모두가 화두이며 자성 흔히 대혜종고 스님을 간화선의 창시자라고 한다. 그것은 대혜스님이 <서장>에서 화두를 공부의 요긴한 방편으로 제창하였기 때문이다. <서장>에서 대혜스님은 여러 가지 화두를 언급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 특히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를 가장 즐겨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되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하니, 조주스님이 말하기를 ‘무(無)’ 하였다.” 이 ‘조주무자’ 화두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하고 있는 편지가 ‘부추밀에 대한 답서’이다. 여기서 대혜스님은 화두 참구의 목적과 방법, 화두의 기능, 화두의 본질 등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먼저 화두 참구의 목적에 관해서 대혜스님은, “만약 곧바로 계합하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이 한 생각을 단박 부수어 버려야 합니다. 그 때에야 비로소 생사에 요달할 수가 있으며 깨달아 들어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그 방법으로서 화두의 참구를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화두 참구의 목적은 문득 한 생각을 부수어버리고 견성하는 것이다. 화두는 곧 말[言語]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왜 견성의 방편으로서 ‘말을 보아라[看話]’고 요구하는가? 대혜스님은 ‘조주무자’ 화두를 제시하고서 말하기를, “이 한 마디 말은 수많은 잘못된 지식과 잘못된 깨달음을 무찌르고 막아주는 무기입니다” 하고, 이어서 여러 가지 잘못된 견해와 수행자의 병통을 언급하고 있다. 즉 화두를 방편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화두가 잘못된 견해와 수행 도중에 처하는 여러 병통을 부수어서 올바른 견성의 길에 들어가도록 안내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화두를 참구하는 방법으로 대혜스님은, “다만 망상으로 전도된 마음과 사량분별하는 마음과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마음과 지견(知見)으로 이해하는 마음과 고요함을 즐기고 시끄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을 일시에 붙잡아 눌러 두고, 그 붙잡아 눌러 둔 곳에서 다만 화두를 보십시오”라 하고, “이것은 있니 없니 라고 이해해서도 안되고, 생각으로 이치를 사량하고 헤아려서도 안되고, 눈섭을 치켜올리고 눈을 깜박이는 곳에 의지해서도 안되고, 문자로써 증거를 삼아서도 안되고, 일 없는 속으로 도망쳐서도 안됩니다”라고 잘못된 공부를 경계하고 있다. 요컨대, 화두를 참구함에는 어떠한 생각이나 느낌이나 말이나 견해의 경계에도 머물러서는 안된다. 어디에든 머무르는 순간 그것과 그것 아닌 것으로 나누어져 이법(二法)에 떨어져 버린다. 이러한 까닭에 무엇보다 먼저 주의할 점으로, “절대로 마음을 두고서 부수길 기다려서는 안됩니다. 만약 마음을 부수는 곳에 둔다면 영원히 부술 때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강조하고 있다. 화두를 부수는 곳에 마음을 두지 말라는 것은 곧 화두를 부수는 대상으로 삼지 말라는 것이다. 화두를 대상으로 삼으면 늘 화두와 나는 별개로서 자타(自他)의 이원적(二元的) 분별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만 하루 종일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속에서 늘 잡아쥐고 늘 알고 계셔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무’를 일상의 삶에서 떼어놓지 마십시오. 만약 이와 같이 공부해간다면 언젠가는 문득 스스로 보게 될 것이니, 그때에는 어떤 일에도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고 있다. 스스로 보게 된다는 것은 곧 말[話頭]이 ‘일어나는 곳[起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말은 어디에서 일어나는가? 바로 자신의 자성(自性)에서 일어난다. 말뿐만 아니라 일상의 삶으로 경험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자성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화두가 일어나는 곳을 안다는 것은 “무…” 할 때, 이 “무…”가 바로 자성일 뿐임을 아는 것이다. 자성은 공(空)이므로, 이미 화두가 자성이요 일상사 모두가 자성임을 “물을 마셔서 그 차고 따스함을 알 듯이” 스스로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다. 그러므로 “무…”에는 어떤 다른 의미도 있을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 다만 “무…”일 따름이고, 이 “무…” 속에 일상사 모두가 갖추어져 있다. 독자 여러분, 말[話頭]에 속지 마십시오! 모셔온글